한국어 B형 간염 수기 공모 당선작 모음 뉴사우스웨일즈 간염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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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책자는 의사 또는 의료 종사자가 제공하는 조언을 대체하려는 목적이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B형 간염을 앓고 있다면 치료 방법에 대해 의사와 상의하세요. 이 책자에 실린 글들에는 저작권이 있습니다. 이 글들은 연구나 훈련 목적을 위해 출처를 표기하고 전체 또는 일부를 복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업적 용도로 쓰일 수 없으며 컨텐츠나 이미지 판매는 금지합니다. 뉴사우스웨일즈 간염협회는 이 책자가 발행된 땅의 전통적인 관리자로서 가디갈Gadigal 사람들을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우리는 모든 호주 원주민과 토레스 해협 섬사람들도 인정하고 존중함을 밝힙니다. 발행일 – 2022년 7월 ISBN: 978-0-9585318-5-6

발행처 - 뉴사우스웨일즈 간염협회 뉴사우스웨일즈 간염협회 웹사이트: www.hep.org.au 뉴사우스웨일즈 간염협회 한국어/중국어 웹사이트: www.hepb.org.au 다문화 HIV간염 서비스 웹사이트: www.mhahs.org.au B형 간염 커뮤니티 포럼: HepBCommunity.org

Contact: info@hep.org.au Chinese translations by: Shan Tao Korean translations by: Stephanie Seo and Mina Kim English editing by: Grace Crowley Layout/design by Rhea Shortus

ABN 30 408 095 245 A non-profit health promotion charity funded by the NSW Ministry of Health. Accredited by the Quality Improvement Council of Australia (QIC). Donations of $2 and over tax deductible.


목차 축하의 말 – 이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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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한국어 B형 간염 수기 당선작을 선보이며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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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부문 수상작 나의 비밀 이야기 – 문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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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직장, 나의 간염 – 이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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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검진으로 지키는 건강 – 비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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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부문 수상작 우리 언니 이야기 – 안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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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형 간염의 심각성을 알게 된 계기 – 김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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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간기증 이야기 – 브라이언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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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상 한 선배의 이야기 –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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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의 말 간전문의 이은아 박사

B형 간염은 전 세계적으로 2억 5천만 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의술이 발달한 현재에도 일 부 지역에서는 이 병이 여전히 신체적 으로나 정서적으로 커다란 고통을 야 기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의 많은 부 분은 이 질환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환자를 지원하고 격려함으로써 예방 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자신이 B형 간염 보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으며, 따라서 의료 서비스에 접근하여 도움을 받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또 많은 분들은 자신의 상태를 알고는 있지만 지속적인 모니터 링의 필요성을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치료는 가능하지만 치료를 막는 장애물은 여전히 존재합 니다. 치료의 효과가 제한적이라는 인식, 부작용이나 치료 비용에 대한 오해가 바로 장애물인데 어떤 것은 사실이기도 하고 사실이 아니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B형 간염이라는 진단이 남에 게 알려질까 봐, 오명을 쓸까 봐 두려워하며 사회적인 영향을 걱정하여 병원을 멀리하기도 합니 다. 이런 경우에는 유감스럽게도 종종 치명적인 결과가 생기기도 합니다. 비슷한 목표를 공유하는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 이것이 간염에 걸 린 모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 가족의 삶을 개선하는 것이며 장애물들을 무너뜨리기 위한 많 은 단계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B형 간염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정을 공유하는 일을 하 신 담대한 분들께 감사드리며, 그들의 용기를 진심으로 축하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의 건강 을 기원합니다.

Alice Unah Lee Gastroenterologist and Hepatologist Clinical Professor Macquarie University, University of Sydney. Senior Staff Specialist. Concord Repatriation General Hospital Director, Hepatitis B Free https://hepatitisbfree.org.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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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한국어 B형 간염 수기 당선작을 선보이며 뉴사우스웨일즈 간염협회 김지현 Mina Kim 한국에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전래동화가 하나 있다. 맹인 아버지를 위해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쳐 희생했다가 구해져서 왕비가 된 심청이라는 여성이 자신의 맹인 아버지를 찾을 방법이 없어 전 국의 맹인들을 다 커다란 잔치에 초대하는 이야기. 왕비는 결국 아버지를 만나고 아버지는 기쁨 에 북받쳐 눈을 뜬다. 우리는 어떻게 뉴사우스웨일즈 주 내의 B형 간염 환자들을 찾을 것인가? 증상이 없어서 평소에 신경을 안쓰고 살다가 갑자기 간암등 심각한 병으로 앓게 되는 B형 간염 환자들을 우리는 찾아 야 했다. 그 분들이 정기적인 모니터링을 받도록 상기시키고 미리미리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 우 리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심청이 아버지 심봉사처럼 숨어 있는 B형 간염 환자들 을 찾을 것인가? 이런 의문에서 B형 간염 수기 공모는 시작되었다. 2021년 코비드로 인해 전국이 봉쇄에 들어갔을 때 우리는 중국어와 한국어의 언론 매체에 B형 간염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겠다는 광고를 크게 냈다. 본인이 B형 간염을 가지고 있는 사 람. 그리고 가족이나 친구가 B형 간염이 있어서 그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사람. 처음에는 한 두 명만 우리의 광고를 보고 수기를 써서 응모해 주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코비드 시대라 서 대면 프로그램은 할 수 없었고 광장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B형 간염의 위험성에 대해 말 할 수 없었기에 이런 시도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 수기를 제출하는 사람의 수가 적어도 이런 광고자체가 하나의 보건정보 홍보가 되어 B형 간염 보유자이지만 잊고 있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건강을 돌봐야 함을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면 했다. 그 결과 우리는 12개의 이야기를 갖게 되었다. 현재 호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진실한 이야기 들. 자신의 이야기, 힘들었던 이야기, 가족을 꾸린 이야기, 빼놓지 않고 정기 검진을 하는 이야기, 호주와 고국의 다른 점, 그리고 친구나 친척들의 간염 이야기 그래서 더 이 병에 대해 잘 알게 된 이야기. 여러분들은 중국와 한국의 각자 다른 상황에서 B형 간염을 만나고 이겨내고 호주에 와서 다른 종류의 케어를 받고 감사해 하는 한 사람 한 사람 고유의 이야기를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이 책 을 접한 분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이 이야기들 속에서 모르던 무언가를 배우고 해야 할 일을 발견 하고 같이 노력하면 좋겠다. B형 간염이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그날까지. 2


FIRST PRIZE WINNER | KOREAN | LIVED EXPERIENCE - JI YOUNG MOON

2021한국어 B형 간염 수기 본인 부문 1등상 수상작

나의 비밀 이야기 문지영 저는 현재 B형 간염 약 비리아드Viread를 먹고 있고 시드니에 살고 있는 만 36세의 여 성입니다. 5년 이상 비리아드를 꾸준히 복용하고 있는 덕분에 현재 바이러스 수치나 간 기능에는 아무 문제없이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건강한 두 아이들의 엄마이 고 아이들 모두 모유수유해서 키웠습니다. 제 글이 어떻게 쓰여질지 모르겠지만 저의 경 험담이 누군가에게는 꼭 도움이 되길 바라며 글을 적어 봅니다.

저는 어머니가 B형 간염 보균자 (현재는 보균자라는 말을 쓰지 않고 B형 간염 보유자 또는 만성 B형 간염환자라는 말을 씁니다. 여기서는 전부 보유자로 바꿉니다 – 편집자 주)이셔서 태어날 때 저 역시 B형 간염 보유자로 태어났습니다. 예상컨대 제가 태어날 당시 한국에는 B형 간염 예 방접종이 없었거나 어머니가 모르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실제로 B형 간염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건 제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처음 으로 헌혈을 하게 되었을 때입니다. 친구들과 다같이 헌혈의 집에서 헌혈을 하게 되었고 며칠 뒤 저는 제 혈액을 쓸 수 없으며 저는 헌혈을 하면 안된다는 피검사 결과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여쭈었고 그때 처음으로, 외할머니에게서 어머니가 태어나 B형 간염이 되었고 저 역시 같은 경우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다시는 헌혈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B형 간염을 위한 특별한 검사나 치료 역시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잊어버리고 몇 년을 살았습니다. 2007년 호주에 처음 오게 되었고 이곳에서 영주권을 받고 쭈욱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고 여러가지로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2011년 마침내 영주권을 위한 준비가 모두 끝났고 서류 를 전부 제출하고 거의 마지막 단계였던 신체검사만을 남겨 두고 있었습니다. 신체검사를 하는 기관에서 이런 저런 테스트를 하고 설문지에 나에게 해당되는 사항을 답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Hepatitis B, 즉 B형 간염 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었고 불현듯 내가 여기에 해당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담당자에게 제가 B형 간염 보유자라는 말을 하면서 호주에서 저의 B형 간염 검사와 치료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와서는 이렇게 가볍게 말하지만 사실 그 당시에는 제가 B형 간염 보유자라는 것을 드러내 3


어 이민성에서 신체검사 시 추가로 요구하는 사항이 늘어나 영주권을 받는 과정이 길어지는 바 람에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모릅니다. 그날 기본 신체검사를 마치고 이민성 담당자는 저에게 간에 관련된 정밀 피검사와 초음파 결과 를 제출해 달라고 했고 의사에게서 저의 간 상태에 대한 의견을 받아 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처 음으로 성 빈센트 St. Vincent’s 병원에 있는 내과 전문의Gastroenterology Specialist를 만나 서 피검사, 초음파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 나이는 25세 였고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았으며 특별히 다른 질병도 없었던 터라 바 이러스 수치는 조금 높은 편이나 간기능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것 때문에 영주권을 받는데 불이익을 당할 이유가 없다는 의사의 소견으로 다행히 모든 것이 통 과되고 마침내 영주권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만 의사는 6개월에 한번 피검사와 1년에 한번 초음 파를 꼭 받으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일반의 GP 를 통해 피검사, 초음파 결 과를 받아 1년에 한번씩 간클리닉Liver Clinic에서 전문의Specialist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저의 간 바이러스 수치가 점점 올라가다가 2016년 무렵 바이러스의 양 이 수치를 셀 수 없을 만큼 치솟게 되어 의사 선생님은 그때 처음으로 비리아드Viread라는 약을 권해 주셨습니다. 다행히 모든 치료/예방과정과 복용약 역시 메디케어로 커버가 가능하여 본인 부담이 없어서 고민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약을 복용하고 몇 달 뒤 피검사를 다시 했고 너무나 다행히 약의 도움으로 바이러스는 정상수치로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의사 선생님은 언제 어떻게 수치가 바뀔지 모르니 정기적인 피검사는 꼭 받도록 지시하셨습니다. 2017년 이사를 하게 되면서 리버풀Liverpool 병원의 간 클리닉Liver Clinic에 다니기 시작했습 니다. 거기서 의사선생님과의 상담 중에 비리아드 복용을 하면 임신/출산, 그리고 모유수유에 문제가 없거나 아주 낮다는 말씀을 듣고 저는 평소와 같이 매일 약을 복용하면서 첫 아이를 임신 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출산했을 때 반드시 출산된 아이가 B형 간염이 되지 않게 하기위해 면역 글로불린Hepatitis B Immunoglobulin 주사를 맞아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다행히 별 문제 없이 출산했고 미드와이프의 도움으로 아이는 그 주사도 잘 맞을 수 있었습니다. 출산 역시 같은 병원에서 하게 되자 간클리닉에서 저를 더 관심 있게 지켜봐 주셨습니다. 아이가 9개월이 됐을 무렵 아이의 피를 뽑아 B형 간염 면역이 생겼는지 검사를 했고 다행히 아 이는 저를 통한 B형 간염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첫째 아이의 경험을 통해 둘째 아이 역시 같은 약을 복용하면서 임신과 출산을 하였고 현재 4개월째 모유수유 중이지만 저도 아이도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리버풀 병원의 간 클리닉에서 정기적으로 피검사와 의사 상담을 받고 있으며 바이러스 수치와 간 기능은 모두 좋은 상태 입니다. 사실 제가 B형 간염 약을 먹고 있다는것은 저의 직계 가족과 아주 가까운 지인 외에는 잘 모르고 제가 말을 하지도 않습니다. B형 간염이라는 질병의 인식이 한인 사회 내에 그렇게 긍정적인 4


것만은 아닌 것은 사실이고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기에 저는 굳이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행히 저는 간 기능상 문제가 없기에 불편함이나 차별을 받은 경험도 없었습니다. 다만 평생 하루에 한 알 약을 먹어야하는 수고로움, 그리고 술과 담배를 멀리 하는 것을 비롯해 남들보다 조금 더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저 스스로 조금 위축되는건 사실입니 다. 하지만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이쯤은 감수해야 하겠지요. 제가 지금까지 간에 아무 문제 없이 살아올 수 있었던 건 10년 전부터 해온 호주의 고마운 의사 선생님들과의 상담 덕분인 것 같습니다. 한국은 어떤 시스템인지 모르겠지만 호주에서는 B형 간염 환자를 아주 잘 관리해 주는 것 같아 저는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 저의 B형 간 염자로 살아온 경험을 말씀드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선 소감 와우! 진짜로 당첨되다니 감사합니다. 코비드 락다운 기간동안 심심해서 저의 직접적인 경험을 그 냥 써 봤던 거 뿐인데 이렇게 1등상까지 주시니 너무 뿌듯합니다.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 문지영 5


SECOND PRIZE WINNER | KOREAN | LIVED EXPERIENCE - SOONIE LEE

2021 한국어 B형 간염 수기 공모 본인 부문 2등상 수상작

나의 직장, 나의 간염 이순희

이순희씨가 한국의 직장에서 일하는 모습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37년을 그곳에서 살았고 호주로 이민을 와서 28년째 살고 있다. 내 삶의 절반으로부터 나의 B형 간염 이야기는 시작이 된다, 그것도 우연히.

처음 B형 간염 확진을 받은 것은 다니고 있던 회사에 처음으로 도입된 정기 건강검진에서였다. 서울에서 외국인 회사 지사에서 근무할 때니까 32년 전 내 나이 33세였다. 그때는 수치가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정상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들 자기 건강보다는 일이 우선이었던 때라 나 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그 이후 매년 정기 검사만 받고 있었다. 그러나 2년 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려고 했을 때 남편은 나의 B형 간염 상태때문에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 이유는 아이가 그대로 간염을 물려 받아 건강하지 않으리라는 잘못된 염려 때문이었다. 나는 이미 의사에게 임신에 대한 조언을 들어 괜찮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남 6


편은 확실하게 믿음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 우리는 함께 의사를 방문했고 의사는 내 상태로도 아 이를 건강하게 갖고 낳을 수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렇지만 가능하다면 일은 쉬는 것이 좋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좋은 직장을 놓칠 수가 없어서 일을 계속했고 아이도 낳았다. 아이는 건강했고 낳아서 예방 접종을 받았다. 그 이후로도 나는 B형 간염에 대한 안내를 의사로 부터 자세히 듣지 못했고 계속해서 모니터링를 하자는 안내도 받지 못했다. 매년 회사에서 하는 건강검진에서 나의 간염을 모니터링하는 것이 다였다. 한국에서는 이 시기에 잘못된 정보로 주위에 많은 사람들은 B형 간염을 가진 사람과 같이 음식 을 먹는 것을 꺼려하여 서로 B형 간염 보유자인지 굳이 묻지 않았고 나도 알리지도 않았다. 자세 한 B형 간염에 대한 안내도 없었고 다만 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진 잘못된 B형 간염 전파 경 로, 보유자와 음식을 같이 먹어도 전염될 수 있다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된 것도 아니고 의학이 지금처럼 발달되지 않았던 때라 올바른 B 형 간염에 대한 안내나 지침도 부족했다. 아이가 18개월때 우리는 남편이 미리 신청한 호주로 이민을 떠나 왔다. 이민 초기에 한국에 사 는 나의 가까운 지인이 B형 간염으로 인한 간경화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나이는 고작 40대 초반이었다. 이 시기에 한국은 암으로 세상을 많이 떠나는 시기였고 B 형 간염 안내나 치료는 여전히 많이 없었다. 나의 어머니도 만성 B형 간염 환자셨는데 발견이 늦어 오랫동안 간염을 방치한 게 되었고 결국 간경화와 함께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내가 이민 온지 5년이 지난 때이고 그 때 나의 어머니 연세는 67세였다. 나와 나의 오빠는 그대로 엄마의 영향을 받아 B형 간염 보유자로 살아 온 것 이다. 초기 호주에서의 삶에서도 B형 간염에 대한 나의 태도는 많이 변하지 않았지만 차츰 나의 건강 이 내 자신뿐만 아니라 내 가족에게도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는데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그 기폭제가 되었다. 특히 간은 상태가 나빠져도 특별한 증상이 없어서 나의 어머니가 그러지 못 했듯이 일찍 찾아서 치료 받기가 쉽지 않은 장기이기에 말이다. 그건 호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이 때쯤부터 나는 가정의GP 병원에서 리셉션 일을 하게 되어 건강을 챙기는 일에 더욱 가깝게 되었다. 병원에서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일을 하니, 가족 모두 특히 내 아이에 대한 간염 걱정을 풀어 가며 살 수 있었다. 가정의의 안내로 전문의를 만나 정기적으로 검사와 진찰로 계 속적인 모니터링을 시작했고 약물 치료를 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 지속적 치료를 받고 있으며 전문의의 안내로 일정한 시기마다 피검사, 씨티 스캔CT Scan을 한다. 초기에는 내 간이 간경화 증세가 있어서 21-25년 전에 간 조직검사와 함께 치료 가 지속되었고 때론 전문의의 조언으로 약을 바꾸기도 했고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7


뒤를 돌아 보면 내가 B형 간염을 모니터링하면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호주로 이민와서 부터이다. 한국에서의 삶은 늘 일에 매달려 있었고 그러므로 자신의 건강을 챙기면서 살기가 쉽지 는 않았다. 동료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술자리는 필수였고 그 양과 횟수는 적을 수가 없었 다. 내 식구 위주의 호주 생활은 집밥을 우선으로 먹게 되었고 술은 거의 끊는 수준이 되었다. 지금 은 거의 마시지 않는 수준으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일정한 시기마다 검사를 하면서 내 건강을 조금 더 관찰하게 되었고 먹거리 역시 신경을 쓰며 먹게 되었다. 매일 챙겨 먹는 약과 지속적인 운동으로 내 간은 정상 기능으로 평안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정부의 관심과 전문의의 끊임없는 도움으로 지금의 내가 있어 가슴 깊이 감사하다. B형 간염 확진은 내 삶의 건강의 중요성을 깨닫는 근거가 되었고 지속적인 모니터링과 함께, 신뢰하는 전문 의의 조언과 지침 그리고 필요한 치료로 아무 두려움없이 함께 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

당선 소감 저는 이은아 박사의 오랜 환자이고 최근에 직장에서 은퇴하였습니다. 코비드로 바깥 출입을 할 수 없는 봉쇄 기간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더니 간염협 회를 소개받았고 협회에서 글을 써보라고 해서 수기를 써서 내었습니다. 앞으로도 같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배우면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 이순희 8


THIRD PRIZE WINNER | KOREAN | LIVED EXPERIENCE - VIOLA

2021한국어 B형 간염 수기 공모 본인 부문 3등상 수상작

정기 검진으로 지키는 내 건강 비올라

비올라와 3세 딸

저는 어머니에게서 수직감염으로 B형 간염을 얻게되어 B형 간염 보유자가 되었으나 남 들과 다를 것 없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대학 진학할 때까지만 해도 별 불편없이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취업을 할 때쯤은 대기업이나 공기업 등 취업 신체검사에서 B형 간염 보유자나 환자에게 취업 불이익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며 차별에 대해 실감했던 것 같 아요. 그래서 대기업 쪽으로는 아예 취업할 엄두를 못냈던 것 같습니다. 9


한국인 10명 중 1명은 B형 간염 보유자이고 한국 및 아시아에는 많은 수의 B형 간염 환자가 있 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고 나도 많은 사람 중의 하나라 간 건강에 대한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어디가 아프지 않으면 병원을 찾지 않듯이 저 또한 병원을 가까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한동안 회사 업무와 스트레스 때문인지 피로도가 심하고 휴일에는 누워만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 같아 병원을 방문했고 간 수치가 높아 항바이러스제를 투여하자는 의사선생님의 조언으로 비 리어드Viread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5년 정도 전의 일입니다. 정기적으로 의사선생님을 만나고 초음파도 6개월에 한 번씩 찍으면서 정기적으로 간 상태를 확 인하니 안심이 되고 오히려 간 건강을 챙기는 계기가 되는 것 같아 건강적인 측면에서 득이 되었 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2년 전 결혼을 하고 호주로 건너 오면서 또 한 번 차별을 경험했습니다. B형 간염은 중증 질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른 선진국들과는 달리 비자를 받는데 많은 어려움들에 직면하게 되 어 의아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결국 비자를 승인받았고 호주에서 정기적으로 초음파검사를 하고 스페셜리스트를 만나며 잘 관리하고 있습니다. B형 간염 환자로 제일 걱정이 되었던 건 임신 중 비리어드 약을 계속 복용해도 될까? 아기를 낳 으면 수직감염되지 않을까? 모유 수유는 가능할까? 하는 걱정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의사선생 님께서 임신 중에도 비리어드 복용은 괜찮다고 하셔서 약을 계속 복용했고, 출산 후 모유 수유도 했습니다. 아기는 총 3번에 걸친 접종을 받고 혈액 검사 결과 저의 B형 간염이 옮지 않았다는 결과를 들었 어요. 저는 신랑과 다행이라며 마음을 쓸어내렸습니다. 비록 일상생활에 큰 지장은 없지만 아기 에게 B형 간염을 물려주고 싶진 않았거든요. 침묵의 장기라는 간, 평소 관리를 잘 하는 게 중요하지만 그게 또 쉽진 않더군요. 하지만 오히려 저는 B형 간염 때문에 정기적으로 모니터링하며 간 건강을 챙길 수 있어 다행이라고도 생각합니 다. 정기 검진, 스트레스를 줄이고 규칙적인 식사와 가벼운 운동, 금주 등 일상생활에서 지킬 수 있는 간단한 방법들로 여러분도 간 건강과 사랑하는 가정을 지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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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ST PRIZE WINNER | KOREAN | ACQUAINTANCES - JIN AHN

한국어 B형 간염 수기 공모 지인부문 1등상 수상작

우리 언니 이야기 안진숙

안진숙씨가 호주의 바닷가를 걷고 있다

우리는 6남매다. 3남 3녀. 내가 늦둥이여서 바로 위의 다섯째인 둘째 언니와도 6년이나 차이가 나고, 큰 오빠하고 는 20년 차이가 난다.

큰 오빠가 워낙 집 안팎으로 파워가 세서 동생들은 아버지보다 큰 오빠 말을 더 무서워 했고 손 가락 하나에도 좌지우지 되었다. 또한 큰 오빠가 동생들을 신체적, 정신적으로 단련시킨다는 명 목 하에 새벽녘 동이 트기도 전에 동생 모두를 깨워 마당으로 집합시켜서 매일 거위걸음, 뜀뛰 11


기, 줄넘기 등을 훈련시키고 기합도 많이 주곤 했었다. 큰 오빠가 결혼하기 전까지 그 고난은 계속되었고, 나는 그 당시 어린애였어서 다행히 피해갈 수 있었다. 가장 피해를 많이 당한 사 람이 셋째인 막내 오빠와 다섯째인 둘째 언니였다. 그렇게 큰 오빠에게 시달리던 둘째언니는 언니 나이 22세때에 급성 간염에 걸렸다. 그 때 의 사의 권유로 우리 가족 전체가 간 검사를 하게 되었는데, 둘째 오빠만 바이러스가 없었고 큰 오빠는 간경화, 큰 언니와 막내 오빠 그리고 나 이렇게 3명은 B형 간염 보균상태 (지금은 쓰 지 않는 말입니다. 바이러스 활동이 현재 없더라도 B형 간염 보유자나 만성 B형 간염 환자라 고 부릅니다. 이하 보유자로 통일합니다. – 편집자 주)라고 했다.* 다들 청천벽력같은 검사결 과에 ‘어떻게 이렇게 모두 다 간에 대한 병이 걸릴수가 있느냐며, 검사가 잘못된 게 아닌가?’하 고 놀랐다. 계속해서 여러 병원을 다니면서 검사했지만 결과는 모두 같았다. 가족 모두는 한동 안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그 때에 형제들 중 큰 오빠와 큰 언니, 작은 오빠는 각자 결혼해서 분가해서 살았고 막내 오빠 는 직장이 지방이라 따로 살았기에 우리 집에는 엄마와 아버지, 둘째언니와 나 이렇게 4명이 살고 있었다. 그 당시 내가 고3이었기 때문에 엄마는 작은 언니에게서 간염이 옮으면 큰일난 다고 피해 있을 겸 공부도 할 겸 동네 사설 독서실에 가서 언니가 다 나을 때까지 집에 오지 말 라고 하시며 도시락과 갈아 입을 옷을 배달해 주셨다. 작은 언니는 그때부터 언니 방에서 격리 생활에 들어갔다. ** 방에 요강까지 넣어 주며 화장실 도 같이 못쓰게 하고, 수건과 식기류 등 모든 것을 언니 것으로 따로 지정해서 분리해 놓고 생 활했다. 그 방에서 나온 식기는 모두 뜨거운 물로 소독하였고, 언니 옷도 따로 삶아서 빨래를 했다. 그렇게 언니는 한 달 가량 감금 아닌 감금을 당했다. 지금은 코로나 시대라 자가격리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리지 않지만, 35년 전 그 당시에는 이 런 엄격한 격리는 페스트에 버금가는 아주 큰 전염병일 경우에만 했던 거라 엄마는 동네 창피 하다고 쉬쉬하며 어디 가서 말도 하지말라고 엄포를 내리셨다. 간염이 다른사람에게 옮는다는 심각성 때문에 누구한테 옮길세라 오로지 언니를 철저히 격리하고 치료와 소독에만 집중하느 라 언니가 심적으로 어땠을 지를 헤아리는 정서적 배려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큰 오빠는 식구들의 모든 간 관련 질병이 작은 언니 간염에서 시작된 거라며 자기의 모든 분노와 화를 작은 언니에게 계속 퍼부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사실 큰 오빠의 간경화 는 언니가 급성 간염 걸리기 훨씬 전에 진행 되었던 거라 언니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건데 그 당시에는 간염이 뭔지, 간경화가 뭔지 생전 처음 들어봤고, 간염이 전염성 질병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정보가 전혀 없던 터라 그냥 집에서 제일 힘 센 사람이 화가 나서 계속 언니 탓을 하니까 우리도 정말 언니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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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달 가량 언니는 방에 갇혀 지내다가 다 나았다는 판정을 받고 나서 수 개월 후, 언니는 대학 때 친구의 고향집이 남쪽 끝 바닷가 앞에 있는 경치 좋고 한적한 곳에 있다며, 거기에 가서 푹 쉬고 와도 되겠냐고 아버지께 여쭈었고 아버지는 바로 승낙해 주셨다. 평상시 같은면 꿈도 꿀 수 없는 얘기라 나는 너무 의아했다. 우리 아버지는 엄청나게 엄하고 보수적이셔서 언니들 중 누구 한 명이라도 밤 9시 넘어서 들어 오면 엄마를 포함하여 식구 모두가 단체 기합과 벌을 받았기 때문에 친구네 가서 자고 온다는 말 을 꺼낸다는 건 감히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하루가 아닌 몇 달인데 그렇게 순순 히 허락 하시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언니는 급성 간염이 치료된 이후에 아주 심하게 우울증을 앓았고 그래서 아버지는 공기 좋은데 가서 있다 보면 좀 나아질까 하는 생각에 허락하셨다고 한다. 언니 나이가 그 때 22살. 어리다면 아직 어린나이였는데 방안에서 혼자 격리되어 고열과 구토, 복통을 오롯이 혼자 견뎌 내며 받았을 고통, 정신적으로 느꼈을 두려움과 서러움은 누구도 상상 할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어떻게 버텨 냈을까… . 몸으로 느끼는 통증만으로도 버거웠을텐데 심각한 전염병으로 격리되 었다는 수치심, 큰 오빠의 독설로 인해 가지게 되었을 식구들에 대한 죄책감은 언니를 두번 죽이 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도 그 당시 언니가 병에 걸리자마자 부모님의 강제성 권유로 언니와 떨어 져 지내다가 완쾌된 후에야 만났기 때문에 철딱서니 없이 그저 언니가 여행을 간 것만 마냥 부러 워 했다. 그로부터 20년 후 언니는 간암 판정을 받았다. 다행히 1기에 일찍 발견해서 의사는 천운이라 했 다. 지금은 수술받은지 15년이 지나 안정권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긴장은 놓지 않고 있다. 간염 이라는 것이 예방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고, 걸린 후 완치되고나서도 간암으로 갈 수 있는 확률이 크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계속 주시하고 관리를 해야 하는 무섭고 질긴 질병이 라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며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러면서 회고해 본다. 그 당시 간염이라는 병에 대해 확실한 지식이 있었더라면, ‘큰 오빠의 말도 안되는 비난을 막을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언니가 우울증도 걸리지 않았을텐데… ‘ ‘그러면 간암도 걸리지 않았을텐데… ‘ 라고. 아플 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으로 부터 위로의 말은 커녕 비난을 받아 오히려 상처가 더 깊 어졌을 언니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으로 두고두고 가슴이 메인다. 13


당선 소감 이메일 3줄 쓰기도 버거워하던 내가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또 누군가에게는 정보가 될 내용 을 쓴다고 하니 후딱 한 페이지를 넘겨 쓸 줄은 몰랐네요. 저를 포함한 모든 가족은 현재 간 전문 의를 정기적으로 만나며 간염을 잘 관리하며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 예방과 정기검진으로 건강한 삶을 사시길 희망합니다. - 안진숙 *편집자 주 1 B형 간염은 태어날 때 산모로부터 수직감염으로 옮는 경우가 많아 한 가정의 형제들이 B형 간 염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수상자의 언니분처럼 급성간염 증상이 나타나는 경우 도 있지만 많은 분들에게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관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B형 간염 보유자/만성환자는 평생 정기적으로 간 상태를 모니터하면 건강하게 사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2 B형 간염은 혈액이나 체액으로 감염되며 침이나 다른 매개체로는 감염되지 않기에 식사를 따 로 하거나 옷이나 수건을 소독하는 행위는 B형 간염 예방과 큰 관련이 없습니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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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한국어 B형 간염 수기 공모 지인부문 2등상 수상작

B형 간염의 심각성을 알게 된 계기 김장수

김장수

1994년, 봄이 지나고 초록의 여름이 막 시작되던 때에 한국에서 경험했던 일이다. 당시 늘 함께 지내던 후배 부부와 함께 주말을 맞아 강화도에서 회를 먹고 놀다가 오는 길에 왕새우를 사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후배의 집도 바로 좁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 고 있었기에 틈만 나면 모였었다.

그날도 역시나 우리 집 거실에 모여 새우구이를 막 시작하려는데 후배가 갑자기 우측 상복부가 아프다면서 맥을 못 추는 것이었다. 난 식중독이라고 판단하고 급히 차를 몰고 신정동 고개에 있 15


는 신정병원으로 갔다. 병원에서는 어깨와 가슴에 붉은 반점이나 우측 복부의 통증으로 보아 간 염일 가능성이 높다며, B형 간염은 전염성이 있는 병이라 부인도 같이 검사할 것을 권하였다. 나 역시도 늘 그들과 함께 한지라 함께 피검사를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주사 맞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아내를 설득해 역시 피검사를 받았다. 지루한 일 주일이 흐르고 마침내 결과를 보러 후배 부부와 함께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결과인 즉 나는 B형 간염 항체가 있음으로 나왔고, 아내와 후배 아내는 음성으로 나왔으나 항체가 없으니 예방접종 할 것을 권했다. 그런데 후배는 예상대로 급성 B형 간염이 상당히 진행되어 빨리 손을 쓰지 않으 면 위험하다는 결과가 나오고야 말았다.* 집으로 돌아온 아내와 나는 후배 때문에 꽤나 혼란스러웠다. “당신들 맨날 같이 술 마시고 붙어 다니는데, 이제 어떻게 한데요?” 하며 아내는 술 좋아하는 나를 에둘러 핀잔했다. 사실 이 상황 전에는 내 삶에서 B 형 간염은 생 각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후배의 일로 뜬금없이 간 보호에 나서야 할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의 사 말인즉 대부분은 간암은 B형 간염으로부터 생기고, 술로 인한 간염 발병률은 생각보다 낮다 고 하였다. 그때까지 워낙 술을 좋아했던 난 그 소리에 이해가 잘 안되면서도 마음 속 어디선가 는 묘한 안도의 기운이 온 몸을 감쌌다. 다음날 주사에 대한 공포심으로 시무룩한 아내를 안심시키면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직원에게 B형 간염 예방접종과 관련된 걸 몇 가지 묻고 예방접종 가격과 맞는 횟수 설명을 자세하게 들었 다. 보건소에서는 접종비가 2,400 원이고, 자기들 병원에서는 14,000원이라고 했다. 그리고 예방접종을 한번만 맞는 게 아니라 총 3번을 맞아야 하고, 1차를 맞고 난 후 30~40일이 지나 2차를 맞고 그리고 5개월 후에 3차를 맞으면 끝이라고 했다. 아내는 3번이나 접종을 받아야 한 다는 말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 같았다. 난 애써 아내를 외면하고서, 병원 측에 보건소와 일반병원의 가격차이가 너무 심한 것 같은데, 혹시 약효 차이가 나는 것 아니냐며 직원에게 물었다. “약효 차이는 없어요. 단지 보건소는 나라에서 운영하잖아요” 너무나 간단한 대답에 난 괜히 물었다는 생각에 그저 웃고 말았다. 인적사항을 적고 약 10여분 정도 기다리니 아내 이름이 호명되었고, 난 아내와 함께 주사실로 들어갔다. 두려워하는 아내의 한쪽 손을 꼭 잡고서 앉아 있는데, 간호사가 냉장고에서 약품을 꺼 내며 약품이 차가운 상태로 투여를 하면 아플 수가 있다면서 손으로 1 분 가까이 쥐어 온도를 높 여 준 다음 왼쪽 어깨 위 부위에 주사를 약 10초간 천천히 투여를 했다. 나중에 내가 아내에게 안 아팠냐고 물으니 그냥 따끔할 정도였다고 했다. 16


그 후 아내는 B형 간염 예방주사를 3차까지 맞았지만, 아무런 후유증 같은 건 없었다. 혹시나 B 형 간염 예방접종 주사와 관련해 내 아내처럼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계시는 분이 있다면 전혀 걱 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말해주고 싶다. B 형 간염 예방접종만으로 간암에 대한 가능성을 현저 히 줄일 수 있다는데 예방주사를 피한다는 건 자기 자신과 주위를 힘들게 하는 행동이라고 본다. 한편 후배는 의사가 처방한 대로 치료를 계속했다. 그는 병을 이겨내기 위해 술과 담배도 끊고, 병원을 오가며 의사의 처방과 지시에 따라 1년 가까이 약물을 지속적으로 사용했지만 피로와 식 욕 부진, 오른쪽 복부의 통증은 여전히 개선의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콩, 두부, 생선 등 단백질이 풍부한 영양식을 해주며 병 간호를 하였다. 그리고 초록의 여름이 두 번이나 지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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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후 의사의 치료 덕인지, 지속적인 단백질 위주의 영양가 있는 식단 때문이지는 몰라도 그의 병은 현저한 개선이 있었고, 오른쪽 복부의 통증과 피로감이 사라지고, 식욕이 되살아 났다. 초여름비가 보슬보슬 내리던 날 아침 후배 부부가 결과가 나오는 날이라고 병원을 간다고 하길 래 내 차로 데려다 주었다. 그들을 병원에 내려주고서 근처를 돌아보니 마침 공간이 있어 주차를 하고 병원으로 가 한참을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으니 후배 부부가 원장실에서 나오다 날 보고는 환하게 웃었다. “형님, 간 효소수치가 정상이고 이제 비활동성 B형 간염으로 거의 완치상태랍니다.” “네……. 제 남편처럼 B형 간염이 거의 완치단계**까지 온 경우는 수 천명에 하나 정도래요.” 난 그 때 내 가족이 아닌 남의 일에 그렇게 기쁘고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그들은 그 동안 B형 간염 바이러스와 싸웠던 시간이 떠오르는지 슬픔 반 기쁨 반의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감싸 안았다.

당선 소감 취미로 글 쓰는 걸 이어오면서도 선뜻 내 글을 누군가에게 내미는 용기는 없었는데, 이번 B형 간 염 수기 공모에 응모하게 된 건 감동적인 소설이나 그림 같은 시를 창의적으로 표현하는 게 아니 고, 뇌 어딘가에 저장된 내 경험의 일부를 끄집어 내어 사실적으로 정리해보면 되겠다는 생각 때 문이었다. 그럼에도 막상 글을 써놓고 망설이다가 수상 기대감 따위는 접고서 응모했는데, 이렇게 당선이 되어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다. 단지 이 서툰 글을 여러 사람이 읽는다고 생각하니 쑥스럽고 민망 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거친 비바람에도 싹은 돋아나듯이 나의 투박한 손끝 하나가 B형 간염 감 염 예방에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하며 서툰 글을 높게 봐주신 심사위원들께 고마움을 전 한다. - 김장수 *편집자 주 1 B형 간염은 보통 증상이 없으나 가끔 급성 간염의 증상이 갑작스럽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편집자 주 2 B형 간염은 약의 복용에 따라 비활동성을 보이게 되기도 하지만 평생 정기적으로 계속 간을 모 니터링을 해야 하는 병이라는 것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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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D PRIZE WINNER | KOREAN | ACQUAINTANCES - BRIAN SEO

2021한국어 B형 간염 수기 공모 지인부문 3등상 수상작

나의 간기증 이야기 브라이언 서

간 이식 수술 후 브라이언씨 부모님이 시드니를 방문했다

지난 6월10일은 제 딸의 생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20년 전 6월10일은 저에게 있어서 전혀 다른 날이었습니다. ‘생체 간이식 수술’. 아버지와 제가 같은 시간, 같은 수술 실로 들어간 날입니다. 오늘은 제 특별했던 기억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특별했던 사건은 저를 그나마 조금 이라도 긍정적이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줬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 습니다. 비록 가로 31cm, 세로16cm의 크고 흉칙한 수술흉터가 남아있지만, 나중에 제 아들과 딸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


저희 (아버지와 나) 는 2001년 6월 10일에 간이식 수술을 했습니다. 제가 아버지께 기증했죠. 지금은 아주 옛날 얘기처럼 느껴질 정도로 시간이 많이 흘렀네요.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회복도 빨랐습니다. 저는 그 당시 육군병장이었습니다. 정확히 제대를 2개월 남기고 수술을 한 거죠. 지금에서야 농담처럼 얘기합니다. ‘아, 이등병 때 수술 했으면 바로 군생활 끝 대학 복학했을텐데!’ 아쉽게도 고생 다 하고 말년을 왕처럼 보내야 하는 시기에 수술을 하였네요. 수술하고도 바로 ‘의병제대’로 집으로 돌아와도 되는 상황이었는데, 어리석은 건지 괜한 ‘남자 의 자존심’ 인지 수술한 배를 움켜 잡고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대대장님께서도 말리는 상황이 었지만 그때 당시에 어떤 군인정신이었는지, 꼭 만기 제대를 하고 싶었던 제 의지를 대대장님 도 말리지 못하시는 상황이었죠. 다른 한편으로는 만기제대가 아닌 의병제대로 인해 사회생활 에서의 어떤 조그마한 영향이 있을 거라는 걱정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호주 시드니에 살고 있습니다. 아무도 군대에 대해서는 물어 보질 않죠. 결 과적으로는 쓸 데 없는 일을 한 게 되었지요.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봐도 후회 하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더 아버지께서 생명을 이어 가실 수 있었으니… 아버지께서는 만성 C형 간염으로 젊은 시절을 보내시다가 간경화, 간암까지 간 것이었죠. 큰 수술 하시기 전까지는 암전문 병원인 원자력 병원에 다니셨고요. 제가 휴가 나왔을 때, 아버지 위정맥이 터져서 응급실에 후송될 때 같이 가서 심란한 상황을 직접 보게 되고, 가족회의가 열 리며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생소한 간이식 수술에 대해서 듣게 됩니다. 이미 출가한 누나와 형이 모두 자신들이 하겠다고 했고, 아버지께서는 절대 반대를 외치셨죠. 출가 한 상태인데 사위, 며느리가 보는 시각은 다를 수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하 겠다고 했습니다. 막내이고, 당시 군인이라 몸 상태가 최상일 것이고… 그런데! 아무도 반대를 안 합니다. 심지어 아버지께서도. ‘아! 나구나! ok 할 수 있다! 하지 뭐!’ 라고 생각할 수밖에요. 다행히 모든 조직검사들과 제 간 상태도 훌륭해서 적합 판정을 받고 저는 다시 부대로 복귀해서 전화 한 통만 기다렸죠. 수술 날 짜요. 날짜가 잡히고 아산병원으로 군복 입고 갑니다. 그 당시 아버지께서는 6인실에서 수술대기하 셨는데, 군복 입고 입원실에 들어가자마자 아버지가 저를 얼른 끌고 나오시더라고요. 나머지 5 분들도 같은 간암환자들인데 복수가 엄청 차 있고 얼굴 빛이 흙빛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분들에 게 미안한 생각이 드셔서였지요. 수술은 둘째치고 병원에 한번도 입원도 안 해본 저였기에 군복에서 환자복으로 제 손으로 멀쩡 하게 갈아 입었죠. 갑자기 환자가 된 셈이죠. 20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중환자실에서 회복하는 것은 고통스러웠습니다. 특히, 제 눈앞에 벽시계가 있었는데 시간이 참 안 간다고 생각했던 사실이 이상하게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마취 깨고 아산병원에서 오신 간이식 수술 세계 권위자이신 이승규 선생님께는 제가 멋지게 군대식 경례를 했다고 합니다. 웬 군인 정신이 그때 도졌는지… 그 당시 우리 대대장님의 멋진 모습을 꼭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문병 온 병장들에게 들은 이야 기인데, 수술 당일 아침, 간부를 포함한 모든 대대원들을 연병장으로 집합시키셨답니다. 그리고 모든 장병들에게, ‘우리가 가진 종교는 각자 다르니까, 각자 자기가 믿는 신에게 오늘 서병장과 아버지가 동시에 수술 하는데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게 빌자’. 라고요. 멋진 분이셨습니다. 그래 서 보통은 제대하면 근무했던 군부대 근처에도 가기 싫어한다는데, 저는 대대장님 뵈러 제대 후 종종 찾아갔고 호주 오기 전에도 인사드리고 왔습니다. 저는 회복과 제대 후, 성악을 전공하던 대학에 복귀했는데 담당의사 선생님은 수술로 인해 제 전 공을 바꿔야 하지 않냐는 걱정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진로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던 중 2002년 초에 이 곳 시드니로 1년 어학연수를 오게 되었습니다. 정말 매력적인 나라이며 도시였고, 지내 면 지낼수록 저에게는 정이 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아내를 이곳에서 공부하다가 만 났습니다. 한국에서 아내의 집에 처음으로 인사 드리러 가던 날이 생각나네요. 첫인사를 드리고, 아무래도 처음에 이런 큰 수술이 있었다고 말씀을 드려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기증에 대한 말씀을 드 렸습니다. 물론 무슨 작은 칭찬을 듣자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고요. 말 그대로 시각이 다를 수 있 으니까요. 그냥 맛있게 식사하고 집에 왔더니 지금의 아내, 그 당시 여자친구가 밤에 제게 눈물 로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 큰 수술은 잘한 것이지만, 지금은 젊어서 아무렇지도 않지, 나이 들면서 어떻게 될지 모른 다’ 라는 걱정을 여자친구의 아버지가 하시며 결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한다고 울면서 전하더군요. 심각한 상황이 온 것이지요. 이 이야기를 우리 아버지께서 들으시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라는 생 각이 들더군요. 우리의 사랑은 문제 없었지만, 만남이 삐그덕댔고, 그렇다고 예비 장인어른을 원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이지요. 하지만! 저희의 기도를 들으셨는지 장인 어르신에게 친구인 의사분이 계셔서 간 기증에 대해 자 세하게 여쭤보신 모양입니다. 당연하죠. 딸이 사윗감을 데려왔는데 장기(간)를 70% 나 떼어내 었다니… 그 의사 선생님의 대답은 한마디로 전혀 문제 없고, 오히려 대단히 훌륭한 효자 사윗감 이라고 저를 칭찬해 주셨다고 하더군요. 전혀 모르는 분이 저희에게 큰 힘이 되어 주신거죠. 그 다음이 히트입니다. 두번째 만남에서부터는 제가 성씨가 서씨인데 바로 ‘서서방!’이라고 부르 며 사위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당시 학생신분이었지만, 2004년에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21


아버지께서는 2001년 6월 제 간을 받으시고 건강히 사시다가 2007년 1월에 하늘나라로 가 셨습니다. 수술 이후로 간 문제는 없었던 걸로 알고요. 2003년 그리고 2005년에도 호주에도 어머니와 방문하러 오시고 좋은 시간도 많이 보냈습니다. 그래도 자식 입장으로서 10년, 20년 이상 더 사셨으면 했던 바람이 있었던 건 여러분도 너무나 잘 아시겠지요. 특히나, 2007년 임 종을 지키기 위해서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미친 사람처럼 흐느끼며 10시간을 날아가 던 생각을 하면 아직도 가슴이 메어집니다. 감사하게도 가족은 그 때 당시 한국에 다 있어서 아 버지의 마지막을 기다릴 수 있었고, 저는 시드니에서 10시간 날아가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거의 의식이 없으신 채로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셨다는데, 제가 도착하고 가족들이 모두 아버지 깨우고 막내 왔다고 하니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저를 확실히 알아보시고 환하게 웃으십 니다. 손발 꼼짝 못하시는 분이 손을 번쩍 들어서 제 볼을 만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편하 게 가셨습니다. 하늘나라에 계시는 제 아버지는 현재 하이스쿨에 다니는 제 아들도 못보셨어요. 아버지가 소천 하신 것은 2007년이고 제 아들은 2008년에 태어났으니까요. 그 부분이 정말 마음이 아프지 만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마무리!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잘 하십 시다. 비교적 어린 나이 23세에 제법 큰 수술을 했습니다. 20년 후인 지금은 의술은 더 좋아졌지만, 당시에는 기증자인 저도 위험할 수도 있는 수술이었고요. 수술 전 날, 담당의사한테 여러가지 얘 기를 들었습니다. 그 자리를 피해 있었어야 했는데 고스란히 다 들었지요. 내용인즉슨, 이렇게 될 수도 있다, 저렇게 될 수도 있다 라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부정적인 발언들과 혹시라도 있 을 사고를 대비한 병원 측의 입장, 그리고 보호자의 싸인. 무서웠습니다. 잘 못 될 수도 있다고 해서요. 하지만 모든 게 잘 되었습니다. 제가 꼭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몸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뭔가 내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삶이 조금은 달라져 보이는 겁니다.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같은 느낌이죠. 글로는 표현이 참 어려운데, 세상은 아름답고 충분히 살만한 가치가 느껴진다고 할까요.. 제대로 잘 살 아보겠다라는 건데, 돈을 많이 벌어 잘 살아야지 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조금 더 잘 먹 고 잘 살려고 우린 노력하고 있지만, 지금도 많은 간질환 환자분들은 기증자 혹은 뇌사자 등의 간을 기다리며 겨우 목숨을 이어가고 계시기도 합니다. 의학이 발전 되어서 간질환은 정기적으 로 모니터링을 하면 충분히 미리 막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몸과 마음이 더 힘들기 전에 미리 건강진단도 받으시고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야기들 말 고 현직에 계신 의사 선생님에게 정확한 진단과 예방책을 받아서 C형 B형 간염 환자들은 간과 관련된 질환을 얻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2


당선 소감 좋은 소식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C형 간염을 가지고 계시다가 50세 이후부터 많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어렸을 때 낙동강 주위에 사셔서 어른들이 주는 민물고기를 많이 드시고, 간 디스토마에 걸리셨고 그 이후에 c형 간염을 보유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간염 보유자가 아닙니다. 특이한 것은 이런 상황이 저희 가정에게도 왔 었는데도 저는 B형 간염주사를 맞지 않았었고 그것조차 파악을 하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몇 년전 시드니의 한 의사 선생님이 피검사에서 저에게 B형 간염 항체가 없다고 하셔서 바로 예약하고 2 차까지 맞아서 항체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큰 수술을 받았지만 그 어느 의료 진에게 간염예방주사를 맞으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시드니 의사 선생님이 바로 파악하 셔서 주사를 맞을 수 있게 조치를 해주셔서 아주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간 질환과 관련해서 저희 가족은 지옥과 같은 경험을 해왔기에 항상 관심이 있고 간염예방에 적 극 동참하겠습니다. – 브라이언 서

아버지의 시드니 방문 중에 해변에서 촬영한 브라이언 씨와 가족들의 건강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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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ICIPATION AWARD | KOREAN | ACQUAINTANCES - JANE KIM

2021한국어 B형 간염 수기 공모 지인 부문 참가상 수상작

한 선배의 이야기 김민지

나긋나긋한 목소리와는 대조적인 큰 키에 체구가 좋은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건 대학교 입 학 후 처음 떠난 신입생 환영회 때였다. 기타를 둘러매고 민중가요를 부르던 그의 주변에 는 선배 후배 동기 할 거 없이 항상 사람이 많았다. 웃는 얼굴로 조근조근 항상 사람들에 둘러싸여 밝은 모습만 보이던 그 선배와 나는 가까 워졌고 친남매 같은 사이가 되었을 때 본인이 B형 간염이라고 알려 주었다. 나는 주변에 B형 간염을 앓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 병에 대해 관심이 없었고 무지했다. 24


전염이 될 수 있다는 말을 전하며 타액으로는 전염되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히 지냈다. 아니 아주 솔직히 그 선배와 그렇게 친하게 지내면서, B형 간염, 전염 등에 대해 신경이 쓰인다고 느끼거나 말 하면 안될 거 같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나이가 들어가며 그 애매한 마음은 어느 순간 두려움으로 변했었다. 처음 들 었을 때보다 오히려 수 년 후 B형 간염에 대해, 또 그 전염성이나 전염의 경로에 대해 인터넷 검 색을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선배는 항상 밝아 보였지만 군에 입대했다가 간염 때문에 다시 돌아왔던 그 사건 때문에 군대 이야기는 참 싫어했고 지금도 그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고 선배는 취업소식을 알려 왔다. 최종면접을 통과했지만 건강검진에서 B형간염이 확인되어 채용이 취소될 뻔 했지만 부당한 사유라고 인사과에 항의하였고 다행히 인정되었다고 했다. 원래 담배는 하지 않았지만 술 마시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건 워낙 좋아했던 사람이기에 취 업 후 초반에 술을 꽤나 자주 마셔 걱정을 했지만 지금은 잘 관리해 정기검진 결과도 늘 좋다고 이야기를 한다. 아마 이 선배가 아니었으면 나는 B형 간염에 대해 무지하거나 오해 - 침이나 땀으로도 전염이 된다는 등, 엉터리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참 그래서 세상 어떤 일이든 편견 을 갖거나 편협해서는 안되고 그러지 않도록 노력은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듣고 알고 있는 것들 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사고가 좁아지려 하는것 같다.

선배는 언제든 합병증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갖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두려움에 떨지 는 않는다. 여전히 여자친구도 만나고 - 여자친구분은 항체검사나 예방접종을 한다고 한다. 또 헤어지기도 하고. 약도 잘 챙겨 먹고 검진도 정기적으로 꾸준히 받으며 보통의 사람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게 바쁘게 살고 있다고 하니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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